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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골든 브릿지를 건너면

유명한 노래 중에 샌프란시스코와 추억의 샌프란시스코의 노래가 샌프란시스코하면 저절로 생각이 난다. 세계적 비즈니스 타운이기도 하니 유명세는 나날이 더해지고 있다. 내가 맨 처음 신세를 지기도 한 병원이 문득 생각이 난다. 샌프란시스코의 기후는 낮에는 덥고 밤에는 차가워진다. 가디건(얇은 스웨터)를 그곳 사람(현지)은 자동차에 싣고 다닌다. 원래 밤에는 잘 돌아다니지 않는 것이 나의 습관이니 별로 신경 쓰진 않는다. 우리 식구가 가면 저녁 때 꼭 가는 곳이 있다. 씨훗(푸드) 바다가재를 해변가에서 먹는 것이 늘상 생활화 된 것이다. 크랩(게)는 우리 강아지도 좋아한다. 이번에 우리 가족은 이곳에 놀러온 것이 아니고 조그마한 집을 장만하러 온 것이다. 동생들과 조카가 샌프란시스코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니 훼밀리 쉽을 발휘하여 부동산을 매입하기 위함이었다. 둘 다 여자애들이니 첫 번째 조건이 있었다. 예쁘고 귀엽고 골든 브릿지 주홍색 다리와 가까운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일본과 비슷한 점이 많아서 바다가 가까우니 홈씩(고향이 그리워라)도 없을 것이고 샌프란시스코 대학교도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환경이 좋아야 한다고 했나보다. 부동산 (현지)을 몇 군데 다니다보니 깜찍한 one House(집 한 채)가 눈 안에 들어온 것이다. 작은 이층집이다. 샌프란시스코는 물가가 매우 비싸다. 국제 비즈니스 도시이기 때문에 물가가 하늘을 치솟는다. 그런 타운에 큰 집은 낭비인 것이다. 일단 우리 가족은 다운타운에서 골든 브릿지를 달려 다리를 건너서 왼쪽으로 10여분 달렸다. 그곳은 뷰(경치)가 한 폭의 그림처럼 멋지다 할 정도로 감탄사만 하다가 하루가 저문다. 가까이서 보면 속이 후련할 정도로 꽤나 큰 다리로 보인다. 당시에는 샌프란시스코 안개가 늘 많아서 안개 속에서도 다리는 보여야하므로 다리를 주황색으로 한 것이다. 지금이야 개천가의 다리정도로 밖에 안 보인다. 좋은 영종도 다리 (인천국제공항)가 한국에도 있지 않는가. 동경 한복판에도 레인보우 브릿지라는 흰색 멋진 다리가 있다. 한국 인천국제공항을 가는 다리, 영종도가 일본 동경의 다리보다 나중에 놓여 졌기 때문에 멋스럽고 자랑스럽도록 귀엽고, 훌륭하다고 본다.

 

샌프란시스코 시훗(크랩)요리도 요즘 말(속어)로 인기 짱이다. 바다 냄새가 물씬나고 딜리셔스! 

 

낮에는 덥고 바람까지 저녁에 동반하니 추운 걸 참고 이빠이 크랩을 흡족하게 먹었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몸 컨디션이 박살났나보다. 다음날 아침에 커프(목감기기침)에 걸린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으스스 추웠던 어젯밤의 일이 머리를 스친다. 우리가족은 간단한 회의 끝에 샌프란시스코 대학병원에 가기를 결정하고 대학병원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필자는 워낙 체질이 건강한 편이라 병원을 병으로는 거의 가질 않는다. 뛰어놀다 상처가 나면 그때 간 적이 많다. 샌프란시스코에 오기를 동생과 조카를 생각하면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 후에도 계속 생각이 들곤 했다. 이유는 많지만 그중의 하나 내가 직접 경험한 닥터(의사)와의 이야기를 한다. 나는 그 병원의 패이션스(환자)이다. 내 순번이 되면 어떤 의사 방에 내가 찾아 들어가서 병의 증상을 설명하는 것하고는 전혀 달랐다.

잠시 대기실에 앉아있으면 순번을 기다리는 나에게 하얀 가운의 백인 남자가 다가왔다. “Ms.메구미?” 하고 상냥하게 웃으며 새하얀 가운의 닥터(의사)는, “Hi- 안녕하세요. 나는 의사 누구누구예요.” 라고 말하며 의사쪽이 내가 앉아 있는 대기실 의자 앞에 서서 미소로 대응하더니 “커프(목감기)라면서요? 대스투밷 (그것 안됐군요.)” 이라고 하며 말했다. 예를 들어 음식점에 들어가면 자리로 안내하듯 “제 방으로 진찰하러 가실게요.”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때 너무 놀랐고 지금도 머릿속에 확실히 남아있다. 그 의사를 따라 진찰을 하는 방이라는 곳에 들어가니 널스(간호사)는 방안에는 없었고 의사만이 시종일관 입을 벌려 보라며 텅(혀)를 스텐레스 같은 얇은 긴 걸로 진찰하더니 “약을 며칠 처방해드리죠?”라고 하였다. “땡큐. 아이윌 프리쉬에이드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뒤, 일본의사나 한국의사는 여기와 정반대예요. 풍습인지 프라이버시인지 필자는 잘 모르겠지만 환자를 복도까지 마중나와 걱정스레 이름을 부르고 인사를 나누고 그리고 진찰실로 의사가 안내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나는 사실대로 그 닥터에게 -물론 영어로 대화를 하고- “서비스 업종의 직원들 같아요.” 라고 말하자 “슈어! 위알. (네. 맞아요. 우리 의사들은.) 서비스업이죠. 더더욱 상대는 늘 아픈 사람을 상대하기 때문에 친절해야 하는 부드러운 룰이 있다.” 라고 말한 것이 평생 기억으로 남아 맴돌고 있다. 그 많은 인종 중에 의사들도 많고 환자도 많은 이 세상에서 단숨에 환자를 치료하는 듯 했던 그 의사의 교훈을 내 가슴에 평생을 심어두었다.

 

진찰을 마치고 진찰실에서 나올 때는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라고 말하고 ‘텍겔(건강에 유의하세요.)’ 라는 말을 해준 게 진찰의 마무리였다. 나올 때는 배웅은 없었다. 내가 그때 느낀 것은 환자에게 좋은 힘을 실어 주려고 했던 것이고 진찰이 끝나면 혼자 일어서야 돼요 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본의 의사들은 진짜 움직이질 않는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진찰실에서 움직이질 않는다. 대기실 환자에게 가까이 와 웃으며 인사할 때 환자는 기쁘다. 병이란 그때 반 이상 낫는 것이다. 일본의사나 한국의사들도 본받을만한 일이다. 진찰실을 나온 뒤 나는 계산을 하기 위해 경리에게 가서 크레짓카드를 내밀었더니 나는 미국에 크레짓(신용)이 있는데도 JAPAN 아드레스(주소)를 구태여 물어서 가르쳐 주었다. 미국 여자 병원 직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카드 명세서는 JAPAN 자택에 보내겠습니다.” 그 말에 나는 “왜?”라고 물으니 일본에서 발행한 카드이므로 발행지 주소로 보낸다는 뜻이었다.

 

나는 정확한 점에 다시 숭배한다는 뜻(느낌)까지 들었다. 그 후 샌프란시스코 대학교와 나는 좋은 관계로 이어졌고 동생 조카도 4년 씩 다니고 그 다음 빠리 대학교에 입학하여 다니게 되었지만 SF 샌프란시스코의 좋은 기억들이 나를 다시 동경 속으로 빠지게 한다.

 

훌라이 백 샌프란시스코!

(다시 돌아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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