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수로 재수 좋은 팥밥
팥밥(赤飯, 세끼항)은 일본 전통 주식의 하나로 예로부터 ‘엥기모노(縁起物)’라고 하여 좋은 재수를 가져오는 음식으로 불렸다. 지금도 일본 토목건설업계는 팥밥을 나눠먹는 풍습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전국 어디든 공장에서 삽질을 하기 전에 무사고와 안전을 위하여 팥밥을 먹는 전례 행사가 벌어진다.
처녀 시절부터 공사장을 누비며 팥밥을 먹은 탓인지 어느 사이엔가 세끼항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팥 자제는 알카리성 식품 군단에 속한다. 우리 몸이 산성이니까, 오래 건강하게 살려면 몸을 알카리성으로 바꿔주면 좋다. 전통 의학에서도 팥은 보혈 강장 식품으로 귀하게 여겼다. 한국 와서는 시루떡, 팥떡도 좋아하게 되었다. 갓 삶아 내온 팥밥은 마치 짙은 레드와인 같이 ‘강렬하면서 멋진’ 색깔로 입맛을 자극한다.
참 그러고 보니, 한국의 건설 현장에서도 상량식이 있는데, 그때 커다란 돼지 머리와 홍어무침, 그리고 팥떡을 한 상 가득 차려 놓고, 게다가 돈까지 얹어 절을 하는 것을 보았다. 역시 한국 음식에 공을 많이 들이는 전라도 음식상에서 볼 수 있듯이 푸짐한 걸 좋아하는 것 같다. 한국에서도 팥죽, 팥떡은 액을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이는 음식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본에서는 공사 현장에 한국처럼 팥밥을 늘어놓지는 않고 일본 신사에서 나온 제관이 흰 총채 같은 걸 공중에 뿌리는 의식을 행한다. 공사장의 토지신을 달래 아무쪼록 무사고와 복을 비는 거다. 한국에서는 대들보를 놓을 때 하는데 일본에서는 터 파기를 하기 전에 한다. 공사장 터에 흰 색 바탕에 검정 띠를 일정한 간격으로 칠한 천막을 치고 그 안에서 신관의 의식을 진행한다. 의식이 끝나면 참석자들이 모두 공사장에서 미리 정해놓은 근처 식당으로 가서 팥밥과 작은 도미가 든 도시락을 하나씩 나눠서 먹는다. 팥밥과 함께 생선 도미도 일본에서 재수 좋은 음식(엥기모노)으로 여긴다. 가로, 세로 25센티미터 크기의 도시락에 들어가야 하므로 손바닥만한 작은 도미다. 도미도 정월 설날음식(오세찌 요리)에 꼭 한몫을 한다.
나는 밥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팥이 들어가 있는 것은 다 즐겨 먹는다. 뭐니 뭐니 해도 팥빵은 내가 제일 좋아한다. 팥빵의 속알이 터질 때 추운 겨울창문에 낀 성에처럼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입술에 닿으면 스폰지 케익처럼 친숙한 느낌이 내겐 너무 좋다.
그러고 보니, ‘팥’은 우리 인간들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헌신하는 곡물이구나 하는 생각에, 공사장 팥밥을 늘 먹는 직업을 가진 나는 그저 행복하고 고맙다.
우리 집안은 신사를 많이 지었고 선조대에서는 새 신사를 지어 기부한 적도 적지 않다. 신사를 짓는 데 부실공사란 있을 수 없다. 그만큼 우리 집안은 튼튼한 신사를 어김없이 지음으로써 신용을 쌓아왔다. 그 덕분에 건설업계에서 신사를 많이 짓기로 유명하다. 신사는 목조 건축물이기 때문에 나무를 잘 고르고 잘 말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들보나 기둥이 휘어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아버지와 함께 보르네오 섬에 가서 원목을 직접 잘 선별해서 건조시키고 최종 심사를 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이 떠오른다.
토목건설업은 인간의 기본 욕구인 의식주 중 주거 부분을 책임지는 큰 일인 동시에 공사를 하다보면 뜻하지 않는 인명사고도 많이 일어나는 업이다. 그래서 공사장에서 세끼항을 나눠먹는 풍습이 전해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글을 쓰면서 우리 집안 대대로 공사 현장에서 불의의 사고로 숨진 인부와 직원들에게 새삼 명복을 드리고자 한다.
아버지 손을 잡고 공사 현장을 누비며 팥밥을 먹은 지 어느 덧 반세기가 훌쩍 넘은 것 같다. 내일도 세끼항을 먹으러 어디론가 떠나야 할 운명이라면 팥밥이 전해줄 좋은 운수가 무엇일까, 설레는 마음은 어쩔 수 없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