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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사는 한국인들만을 위해...

열 발자국 쯤 걸어오고 있을 때다. 묘한 냄새에 나는 새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공을 움직이고 있었다. 농도가 짙은 갈릭(마늘) 냄새 같았다. 다시 주의 깊게 맛을 느끼려고 해도 분명, 마늘 냄새가 분명했다. 실내에 무척 짙은 흔적의 개성 있는 냄새였다. 지금은 그런 냄새가 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모양이었다. 전과 똑같은 냄새는 없었다. 그곳은 바로 김포공항이었다. 80년대 초반만 해도 억수로 짙은 향수 냄새처럼 공항이 마늘 냄새로 진동하였다. 내가 처음 공항에 도착했을 때 김포공항의 이미지는 꽤 개성이 있었다. 스페인 요리도 대개 마늘이 많이 들어가지만 거의 모든 음식이 끓이는 것이 많아 요리가 끝난 후에는 그렇게 냄새가 남을 정도는 아니다. 필자는 그것과 비교해본다. 한국의 마늘은 생것으로 만드는 김치에서 나는 것 같다. 생마늘은 후레쉬(싱싱)하니까 마늘이 소유하고 있는 내분비물이 독특한 향과 함께 공기를 접하면 그건 바로 후레쉬한 향수가 된다.

 

말 그대로 마늘 향수이다. 그러나 그런 냄새는 각별한 냄새로 취급이 된다. 적어도 일본에서는. 아니 지구 곳곳을 돌아다녀도 정말 개성 있는 것 같다. “이게 무슨 냄새야!” 라고 말하며 놀랜 것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당시 나는 일본의 중심가인 시나노마치에서 회사 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나에게 한국에서 온 한 중년 남자가 회사로 내방하였다. 소개를 받은 곳은 일본의 요쯔야 소방서 앞 대로변 맞은편에 위치한 요쯔야 빌딩 안, 고문 변호사의 소개로 날 찾게 됐다고 했다. 당연히 회사 고문 변호사로 소개가 되면 떠돌이는 아닌 것 같고 겉보기에는 점잖게 생긴 비즈니스맨처럼 보였다. 슬슬 그쪽에서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미 감을 잡았다. 이야기란 다름 아닌 한국의 용산 국제빌딩 안에 있는 농수산물 유통공사의 O.K 라고 찍힌 검사필 스탬프가 첨부된 고춧가루, 통고추, 실고추, 건조미역, 산쇼(산초) 등 한국에서 일본으로 보낼 때 L/C 레털어브 크레짓 과정을 거쳐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필자는 흔쾌히 승낙했고 한국의 농수산물을 일본에 넣는 대단한 비즈니스를 시작한 것이다. 매우 기뻤다. 나를 선택하여 준 것에 대한 것이 말이다. 과연 일본의 국민 중에 1/2은 한국인이다. 물론 귀화를 해서 일본 성을 획득한 사람도 많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한국인의 피가 몸속에 흐르고 있는 민족이 1/2이 일본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얼렁뚱땅 계산해도 그렇다. 예를 들어서 고춧가루를 일본인이 그렇게 많이 섭취하진 않는다. 전반적으로 그런 레시피가 발견되지는 않는다. 일본의 음식은 마일드하고 스윗(달다)하다. 그리고 DRY SEE WEED(드라이 씨위드) 건조 미역도 바다는 똑같은 바다일텐데 한국 건조미역은 긴 머리 소녀같이 길고 풍성하다. 먹음직스럽고 철분도, 칼슘도 함량이 충분하다. 

일본에 사는 민족들에게 모처럼 해야 하는 크나큰 서비스(봉사)라고 생각하고 진행을 서둘렀다. 그러던 중 나는 삼각무역이라는 부분에 눈을 뜨게 된다.

 

그 당시(1980년)에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직접무역은 할 수 없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것을 삼각무역이라고 하나보다. 프로즌 갈릭(냉동 마늘)과 프로즌 진저(냉동 생강)을 한국 농수산물유통공사에 L/C를 열어주었고 중국의 피넛(땅콩)을 역시 모회사 피낫츠 버터에 들어가는 땅콩도 진행하였다. 그때 당시의 크레임(무역사고)에 나는 무척 쇼크(충격)가 컸던 것이 지금도 가물가물 떠오른다.

 

데리케이트(민감)했었던 부분이 말이다. 냉동에서 냉동으로 한 부분을 운반하다보니 컨테이너에서 내리고 다시 싣는 사이에도 새로운 공기와 온도차이가 격심하다보니 곰팡이가 난 것이다. 한국인에게 좋은 일을 하려고 시작한 일인데 무척 어려운 일을 택한 것에 후회도 많이 했었다. 크레임 처리를 하기위해 일본에서, 그것도 대표가 당일로 용산 국제빌딩으로 향했다. (당시 나는 회사를 몇 개씩이나 운영하는 터라 쉴 틈 없이 바빴다. 지금도 한가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 당시 인터네셔녈 K라 국제상사라는 이름으로 L/C를 열었다. 매번 대표인 나는 크레임 처리를 위해 낮에 서울에 도착하여 크레임 처리를 마치고 당일날 다시 출국하는 비지 우먼(바쁜 여성)이었다. 아마도 수십 번을 그런 방법으로 크레임 처리를 하곤 했다. 들락날락 우먼으로 말이다. 그래서 김포공항의 마늘 향수의 냄새를 기억할지도 모른다. 당시의 건축법과 지금의 건축법은 상이하므로 많이 달라졌다. 요즈음 영종도의 국제공항은 조금도 생마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 당시 나는 크레임 처리 후 쓸쓸하게 김포공항에서 한 끼를 해결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던 나날들이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한국인들을 위해 마늘, 고춧가루 크레임으로 고생했던 나날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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